족보 용어

성균관 代와 世, 世數와 代數 比較
[대(代)와 세(世)는 같으며 기준을 포함한다]  
학술적인 용어로 피세작대(避世作代)라고 했다. 즉 세(世)자를 피해 대(代)자로 바꾸어 썼다.(당태종의 이름이 이세민(李世民)이기 때문)

대조(代祖)와 세조(世祖)/ 같으며 기준을 포함하지 않는다. 앞에 수(數)를 붙여 조상(祖上)을 일컫는 말. 아버지를 1대조(代祖)로 세어 고조(高祖)의 부(父)를 5代祖, 高祖의 祖를 6代祖‥‥‥라 부른다. 옛날에는 世祖도 흔하게 썼으나 근래에는 代祖를 주로 쓴다.

대손(代孫)과 세손(世孫)/같으며 기준을 포함하지 않는다. 앞에 數를 붙여 子孫을 일컫는 말. 아들을 1世孫으로 세어 현손(玄孫=高孫)의 子가 5世孫, 그 아래는 6世孫‥‥이 된다. 옛날에는 代孫도 많이 썼고 지금도 祝文은 代孫을 많이 쓴다. 


함자(銜字)와 휘자(諱字)/현재 우리 나라 사람의 이름은 대게 호적부(戶籍簿)의 이름 하나로 통용되고 있으나, 조선 말기 갑오경장이후 호적법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어렸을 때 부르는 아명(兒名)이 있고, 관례를 거행하고 성년(成年)이 되어서 별도로 보루는 이름 자(字)또는 관명(冠名)이 있으며, 문필 등의 행세에는 이름의 아호(雅號)가 있고, 보첩(譜牒)에 올리는 항명(行名)이 있으며, 그 밖에 따로 행세(行世)하는 별호(別號)등을 사용하여 왔다.

관명[이름] / 사람이 태어나면 부모[조상]가 이름을 지어준다. 그이름을 그대로 호적에 올리면 바로 관명이된다. 
아명/호적에 오르지 않은 다른 이름 

자(字)/이름 대신에 불리워지는 호칭어를 바로 자라고한다.자는 부모나 집안 어른이 지어주는데 자가있으면 곧 어른이 되었다는 증표이다.자는 성인[16세이상]이되어 관례를 치르면 자를 부여한다. 자를 부여하면 어른으로써 사회활동을 할수있다는 뜻이다. 자는 이름대신에 부르도록한 명사이다.사람을 부르느데 있어서는 그 이름을 불러야 마땅하지만 때로는 어색 하거나 결례가 되는 수가 있다. 그래서 관명 대신에 자를 불러주는 것이다. 호에는 존칭이 붙지만 자에는 존칭은 쓰지 않는다. 자를 서로 호칭하는 사이는 동료지간이나 아랫 사람에게만 쓰인다.

호(號)/이름과 자이외의 호칭. 호는 아무나 있는게 아니다. 덕망이 특출하거나 학문 또는 예술이 뛰어나 지방이나 전국적으로 이름이 난 사람이래야만 호가있다. 호는 남이 지어 주는 수도 있지만 대개 자기가 직접 짓는다. 남이 지어주는 송찬(頌讚)은 그사람의 인품이나 자질에서 호를 가질만한 사항을 들어 찬문과 함께 호를 만들어 준다. 대체적으로 호는 자기가 짓는 것이 더 많다. 퇴계도 자호하여. 퇴계. 도옹. 도수. 퇴도.등 여러 가지로 썻다. 
그런데 요즈음은 왼만한 사람이면 모두 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흔한 서예학원에 들어가기만 하면 호를 만드는데 이들이 호를 못가지란 법은 없다. 
다만 책을 펴낸 문인이나 서예학원에서 글씨 쓰거나 문인화를 치거나 관계없이 국전에 입선되어 전국이 알수 있다면 호를 쓰는것도 무방하다. 
 
항렬(行列)/항렬자(돌림자)는 혈족간의 세계(世系)의 위치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으로서 이는 문중율법의 하나이기도 한다.
계촌(系寸)과 계촌(計寸) 
계촌(系寸)/ 부자는 1촌간이고 조손은 2촌간이며 증조손이나 숙질은 3촌간임을 규정해 놓은 계촌법의 준 말 
계촌(計寸)/ 동족간에 있어 상대방과의 촌수를 가린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시호(諡號)/ 공신(功臣)이나 중신(重臣)이 죽은 뒤에 평생의 공덕(功德)이나 행적(行迹)을 기려서 나라에서 주는 명호(名號)를 일컫는다. 경국대전에 보면 조선조 세종 4년(1422) 이후로는 종친과 문무관 중에서 정이품 이상의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에게만 주었으나 뒤에는 범위가 확대되어 제학(提學)이나 유현(儒賢).절신(節臣)등은 정 이품이 못 되어도 시호를 내리었다. 시호를 정하는데 제조(提調)는 관계하지 않고 예조(禮曹)의 판서(判書)이하 만으로 의정(議定)하도록 하였다. 시호를 정하는 절차는 해당자의 자손이나 관계자들이 죽은 이의 행장(行狀)을 적은 시장(諡狀)을 예조에 제출하면 예조에서 이를 심의한 뒤에 봉상시(奉常시)를 거쳐 홍문관(弘文館)에 보내어 시호를 정하였다. 
사시(私諡)/학문이나 덕행이 세상에 높이 알려졌어도 관적이 증시(贈諡)할만한 지위가 못되어 역명지전(易名之典)이 없는 선비에게 붕우(朋友)들이나 일가나 향인(鄕人), 문제자(門弟子) 등이 상의해서 정하는 것을 일컫는다. 
 부조지전(不?之典)/ 어떤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모셔도 좋다는 은전 (특별한 허락)을 받는 것, 
불천지위(不遷之位)/영구히 사당에 모시는 어떤 사람의 신주를 말합니다. 줄여서 불천위(不遷位)라고도 합니다

행직(行職)/ 품계(品階)가 높은 관원(官員)이 직급(職級)이 낮은 일을 맡을 경우를 일컫는다. 예를 들면 개고직비(階高職卑)이니 종일품계급(從一品階級)을 가진 사람이 정이품직급(正二品職級)인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면 관사명(官司名) 앞에 행(行)자를 붙여 숭정대부행이조판서(崇政大夫行吏曹判書)라고 부른다. 
수직(守職)/ 품계(品階)나 자급(資級)이 낮은 관원이 직급이 높은 일을 맡을 경우를 일컫는다. 예를 들면 계비직고(階卑職高)이니 종이품계급(從二品階級)을 가진 이가 정이품계급(正二品階級)인 대제학(大提學)이 되면 관사명(官司名) 앞에 수(守)자를 붙여 가선대부 수홍문관대제학 (嘉전大夫守弘文館大提學)이라고 부른다. 행수직을 쓸 때는 행 . 수를 관명앞에 쓰되 7품이하는 자기의 품계에서 2계(階), 6품 이상은 3계를 뛰어 넘어서 관직을 받 을 수 없었다.

영직(影職)/ 직함(職銜)은 있으나 직사(職事)가 없는 허직(許職)과 같은 뜻이다. 즉 실제의 직무가 없는 명분상의 직을 의미하며, 근무하지 않고 이름만을 빌리던 벼슬을 일컬으며 차함(借啣)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70이상의 전함노인(前啣老人)에게 직을 제수(除授)할 때에 당상관이상 슬록대부이하인 자에게는 영직을 가자(加資)해 주되 전직(煎職)을 그대로 내려주었고, 통정실행정삼품직사자(通政實行正三品職事者)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해당하는 검직(檢職)을 내렸고, 통정미경정삼품직사자(通政未經正三品職事者)에게는 전자당상관검직(煎資堂上官檢職)을 제수하게 한 경우와 같아서 실제로는 영직전생서주부(影職典牲署主簿), 검직에 빈주부(檳主簿)로 제수하는 따위이다. 
실직(實職)/ 직사(職事)가 있는 관직(官職)으로 조선초기의 관직에는 실직과 산직(散職)이 있으며, 실직 가운데에는 정식으로 녹봉(祿俸)을 지급 받는 녹관(綠官)과 그렇지 못한 무녹관(無祿官)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증직(贈職)/ 종이품이상 관원의 부, 조, 증조 또는 충신효자 혹은 학덕이 현저(顯著)한 사람에 대하여 죽은 뒤에 관직이나 품계를 추증하는 것을 일컫는다. 관료(官僚)의 영전(榮典)으로, 첫째 명유(名儒), 절신(節臣) 또는 왕실(王室)의 사친(私親)에게 사후에 품직을 추증하는 것과 둘째 고관(高官)의 부친(父親)에게 추증하는 것이 있고, 셋째 봉명출강(奉命出彊)하여 신몰이역(身歿異域)한자등 대상이 적지 않았다. 
수직(壽職)/ 매년 정월에 80세이상의 관원 및 90세이상의 서민(庶民)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직품(職品)을 일컫는다. 

배필(配匹)/ 배우자(配偶者)를 말하는 것인데 그 표시는 [배(配)]만을 기록한다. 더러는 생존한 배위에 대하여는 실인(室人)이란 [실(室)]자를 기록하며 죽은 사람에게만 [배(配)]자료 표시하는 문중도 있다.

생졸(生卒)/모든 보첩에는 출생년월일과 사망년월일을 표시하게 마련인데, 출생은 ‘생’자만을 표시하며, 사망은 ‘졸’자만으로써 표시하는 것이 통례이다.

향년(享年)/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누린 연륜을 일컫는 말인데, 70세 미만에 사망한 경우에는 ‘향년 몇십 몇’이라 표시.
향수(享壽)/ 70세 이상의 연륜을 누린 사람에 대해서는 ‘수 몇십 몇’이라 표시한다.
 

유생(儒生)/ 성균관이나 사학 또는 향교에서 수학하는 선비를 일컫는 말, 
유학(幼學)/ 생원과 진사를 선발하는 소과에도 아직 합격되지 아니한 백두의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후학(後學)/후배라라는 뜻으로 유학의 학풍을 따르는 학자가 자신을 일컫는 겸침이다.
산림(山林)/ 산림처사의 준말로서 학덕이 숭고하되 벼슬을 외면하고 은거하는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수단(修單)/ 단자를 정비한다는 뜻으로서, 보첩을 편찬할 수 있도록 직계혈족의 명휘자와 사적(방서)을 계대에 맞추어 정리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수단(收單)/ 말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단자를 거둬 모으는 즉 수집을 뜻하는 말이다.그러므로 명하전(名下錢)은 수단금(收單金)이 아니라 수단금(修單金)이며, 접수기한은 수단(修單)마감이 아니라 수단(收單)마감이라야 한다.

 서문(序文)/ 머리말로서 보첩의 서문이라면 대개 존조정신을 고취함과 아울려 보첩간행의 긴요성을 강조함은 물론 목적의식(睦的意識)을 계도하는 것이 통례이다.
발문(跋文)/현대어로 편집후기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보첩의 편찬과 간행소감을 피력하게 된다.
 

화수(花樹)/ 가계를 하나의 꽃나무에 비교해서 쓴 말이다. 한 성씨를 하나의 나무로 생각하며 뿌리는 근원으로 조상을 나타내고 가지는 분파 또는 자손을 말하며, 꽃이나 잎은 많은 자손을 뜻하고 있다.

정승(政丞)/백관의 장, 지금의 국무총리는 정승이라고 했다. 승은 보좌의 뜻이며 정승이라 함은 국와의 정치에 대한 보좌직임을 나타낸 말이다.고려의 선충왕이 종전에 ‘시중’이라 이르던 수상의 호를 ‘정승’이라 고쳤으나 뒤에 다시 번복하였다가 조선조에 와서 정종 2년에 국무최고기관을 의정부라 하고 그 수반을 정승이라 이르니 정승이란 칭호가 사용되기는 이때에 비롯되었다.

판서,참판,참의,낭(判書,參判,參議,郎)/육조의 장관을 조선조에서 판서(정2품)라 일컫고 차관을 참판(종2품)이라 일컬었다. 판이란 결정권을 가졌다는 뜻이다. 참판 밑에 참의(정3품)가 있어 정무에 해당한다. 판서,참판,참의는 모두 정3품 이상의 관이므로 이를 통칭당상관이라 부른다.
참의 이하의 속료로 낭관이라 일컫는 관직이 있는데 낭관 중에는 정랑(정5품) 좌랑(정6품)의 구별이 있다. 현재의 서기관에 해당한다.

대제학(大提學)/ 문관을 맞은 관서의 장을 말한다. 조선조초에는 예문관 대제학만 있었는데 세종 이후로 집현전, 후의 홍문관 대제학이 있어 양관에 대제학을 두었으며, 처음에는 이 둘이 각각 임명되어 오다가 세조조에 거저정이 양대제학을 겸한 후부터 드디어 이런 예를 이루었다.이조에서는 제학이 됨을 문인 또는 문과출신관원의 최고명예로 알았으며, 더욱이 제학의 장은 두 타직을 겸임하였고, 특히 대제학은 본인 사퇴하기까지는 종신직으로 비록 직위가 영의정에 이를지라도 이를 겸임하게 되었다. 문학적 최고 능력자인 그 특수지위에 일반의 존경이 컸기 때문이었다. 

한림(翰林)/조선시대의 예문관검열의 통칭, 조선조에서는 특히 예문관의 봉교 이하를 한림이라 일컬었으며, 더 좁게는 예문관의 최말직인 검열 한림이라 이르게 되어 일반적으로 말하는 ‘한림’은 후자를 가리킨다. 한림은 군주의 문자를 대찬함으로써 원직명의 밑에 한림겸 지제고(知制誥)의 삼자를 부록한다. 이것을 ‘삼자어/三字御’라 하여 세상에서 이를 아주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승지(承旨)/승정원의 관원을 말한다.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군왕의 비서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내외 대소의 문서 및 주달이 모두 승지를 경유하니 그 임무의 중함이 타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감찰(監察)/사헌부의 한 관원(정6품)으로 지위는 가장 낮으나 제일선의 감찰을 담당했던 관계로 일하는 보람은 가장 큰 바 있었다. 지금은 법무부산하에 검찰청이 있는 것처럼 사헌부내에 감찰청이 독립해 있어서 직권상에는 자유행동이 가능하였다. 

종중(宗中)/동족이 일부락 또는 한 지역을 구성하여 집단생활에 영위함에 그 동족간에는 고래의 관습에 의하여 반드시 일족의 단체가 조직되어 있다. 이 동족단체를 종중 또는 문중이라 칭하며, 어느 동족 단체에도 공통된 종규에 의해 동족의 단결과 선조의 제사를 목적으로 극히 원활한 통제가 행해지고 있었다.
 
종규(宗規)/ 일족단체의 헌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며, 동본동성인 자는 한결같이 동족의 의를 지켜 일문의 종규를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종가(宗家)/종중에는 반드시 자손이 있어 부락 또는 동족간에 있어서 최존선조의 가독상속자로서 가묘를 지키고 제사를 주재한다. 이 종손의 집을 종가라고 한다.(봉군을 받은 종손은 종군이라 한다.)고래의 한국 가족제도에서는 일가의 직계촌속진이 생존하는 동안 대개의 경우 분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날에는 대가족제도의 가정이 많았던 것이다.
 
문장(門長)/종중에는 종손 외에 종장 또는 문장이 있다. 문장은 실로 일문의 장자로서 그 대표이사자이며, 종손이라 할지라도 종중에 관리사무에 대해서는 그 지배를 받지 않으면 안 될 최존의 권위자이다. 문장의 선임은 각 종중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항렬이 가장 높고 대조가 종조에 가까운 사람으로 하는 것이 통례이다.
 
유사(有司)/문장 밑에 몇 사람의 유사를 두고 유사는 문자을 보좌하여 사무를 집행한다. 유사의 선임은 공선이 보통이나 문장이 이를 지명하는 예도 있다.

종문회(宗門會)/문장이 종무를 집행하는데 그 중요한 것은 문회(종회)를 열어 결정한다. 문회는 매년 제전(祭典)전후에 개최하는 것이 상례이나 긴급한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는 문장이 임시 회의를 소집한다.

대동종약소(大同宗約所)/종족간의 기관으로 그 조직에는 종래의 대종중을 변혁하여 그 대신으로 생긴 것과 대종중 외에 따로 설정된 것이 二종이 있다. 종약소는 동일시조에서 나온 남계 혈족 중인 남자인 종원으로 구성하게 된다.

종중재산(宗中財産)/종중에는 종중의 공동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대체로 다소의 재산이 있으나 종재가 없는 성씨도 있다. 종중의 소유한 산림을 종산이라 하며 전답은 종토,위토,종전,종답 등이라 칭하였고, 또한 제사의 비용을 지출하기 위해 설정한 것은 제위토,제위답,제산,제전이라 하며, 묘지 관리를 위해 설정한 것은 묘전?묘답 그리고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설정한 것은 학전(學田),학답(學畓) 등 여러 가지 명목으로 부르고 있다.

시향(時享)/ 시제와 공통된 말로서 종중의 대제를 말한다. 매년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말하며, 음10월에 5대 이상의 조상 산소에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이를 시사라 하기도 한다. 이 제사는 일정한 의식에 따라 행하게 된다.

서원(書院)/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고, 석학 또는 충절로 죽은사람을 제향하는 곳이다. 그 기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주자의 백록동 서원을 본받아 고려의 명유 안향이 전에 살던 백운동(영주군 순흥면)에 백운동 서원을 세워 그를 봉사하고 유생들에게 독서와 강학을 하도록 편의를 제공하였던 것이 그 효시라 한다. 뒤에 이퇴계가 풍기군수로 취임하여 이 서원을 민간인의 경영에 맡겨두면 퇴폐 될 염려가 있다하여, 도백에게 청하여 관비로 이를 지원해 주도록 했다. 이리하여 국가로부터 서적,노비,토지 등을 받아 경영의 기반이 튼튼해 지게 되었다.
그 결과 선조 댸에 100개소에 달했고, 영조 때에 600개소에 향사선유의 수는 1349명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서원의 난립에 따라 여러 가지 폐단 또한 없지 않아 고종초에(1863~1907 제26대 조선 왕)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된 47개소만 남겨두고 모두 정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승무유현(陞?儒賢)/역대로 문교에 유공한 유현으로 문묘에 종사된 이를 승무유현이라고 한다. 국학인 성균관에는 으레 문묘를 베풀고 공자를 모시는 동시에 동무,서무,양무에 유공한 유현을 섭사한다. 
선유로 승소한 이는 다음 18현이다. 

향교(鄕校)/ 지방의 중등교육기관으로, 향사를 교육하는 곳이었다. 향교는 고려 인종 댸에 처음 설립되었는데, 중간에 유명무실한 때도 있었으나 이태조 원년에 각도의 안찰사에게 명하여 부?목?군?현의 소재지에는 반드시 향교를 설립하도록 하여 어느 고을이고 향교가 없는 곳이 거의 없었다.

사당(詞堂)/신주를 모시는 집을 사당이라 한다. 1390년(공양왕 2)에 가묘를 제정하라는 명을 내려 이때부터 각 가정의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을 짓게 되었다. 고려말의 학자 조준은 우리 나라에 옛날부터 가묘가 있었으나 중간에 없어지고 다만 각 가정에 신사를 두어 그 집을 보호하고 있었다고 하여, 상고시대부터 각 가정에 사당이 있었음을 주장한 바 있었고, 조선조 때 이제신은 정몽주에 의하여 비로서 사당을 두게 되었고 주장한 바 있어, 그 시초에 대하여는 확실하지 않다.

봉군(封君)/군 또는 봉군은 고려 충렬왕 서기 1298년부터 시작된 제도로서 종친이나 공신에게 주던 존호로서 정1품 이상으로 정해졌다. 그후 1356년부터 6년간은 이 제도를 폐지하고 공(公) 후(侯) 백(伯)의 작위(爵位)를 주다가 다시 1362년부터 부활하였다.고려 초기 문종 때에는 상주국 또는 개국공?후(開國公?侯)란 훈계(勳階)를 정하고 정2품이상에게 주었던 것을 충렬왕 때에 와서 군(君) 제도로 개칭한 것이다. 
김은부(金殷傅) 김경용(金景庸) 김부식(金富軾?부일?부의) 등 3형제 김방경(金方慶) 등은 모두 상주국 혹은 개국공을 받았다. 
고려사나 기타 문헌에도 이 기간중에 군호를 받은 사람은 없다. 
다만 경순대왕이 고려에 양국한 후 상부(尙父) 시절에 낳은 아드님들에게 군호를 붙여 본관의 관시조로 하고 있으나 이 당시에는 군호의 제도가 없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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